168.1km를 부러워해도 임찬규가 12승까지 온 이유
임찬규가 시즌 12승을 채우며 다승 공동 선두까지
올라섰지만 숫자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투구 방식입니다.
26일 잠실 NC전에서 6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지키며 LG의 8대0 완승을 이끌었습니다.
빠른 공으로 상대를 압도한 것도 아니고 탈삼진을
두 자릿수까지 쌓은 경기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NC 타선은 6회까지 단 한 점도 만들지 못했고
임찬규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또 승리를 챙겼습니다.
이날 승리로 임찬규는 시즌 12승째를 기록하면서
두산 최민석과 함께 KBO 다승 공동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최근 네 경기에서는 모두 6이닝 이상을 책임지며
연속 퀄리티스타트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8월에는 3경기 18이닝 동안 단 1자책점만
허용하며 2승 평균자책점 0.49를 기록했습니다.
승수에는 타선 지원이라는 변수도 따라붙지만 매 경기
6이닝을 꾸준히 넘기는 능력은 선발 자신의 몫에 가깝습니다.
LG가 시즌 막판 순위 싸움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이런
재현성은 단순한 한 경기 호투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임찬규에게 NC는 유독 쉽게 풀리지 않았던 상대였습니다.
마지막 NC전 승리는 2018년 7월 4일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이후 8년 넘게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상대 타자들의 최근 성향부터 먼저 살폈습니다.
NC 타자들이 초반 카운트부터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점을
보고 세 구 안에 빠르게 승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실제로 제구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야수들의 좋은
수비까지 더해지면서 큰 위기 없이 6이닝을 끝냈습니다.
임찬규의 투구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따라붙는 것은
역시 다른 정상급 투수들과 비교하면 빠르지 않은 직구입니다.
하지만 이제 14번째 시즌을 보내는 임찬규에게 구속은
자신이 어떤 투수인지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타자의 성향을 읽고 빠르게 승부할 때와 볼카운트를
길게 가져갈 상황을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 커브와 체인지업 슬라이더 등을 섞으면서 타자가
한 가지 타이밍에만 맞춰놓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강한 공이 부족하다면 다른 부분을 더 세밀하게 만들어
선발투수로 살아남는 길을 찾은 셈입니다.
경기 뒤 임찬규가 좋아했던 메이저리그 투수를 묻자
잭 그레인키와 카일 헨드릭스의 이름부터 꺼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압도적인 구속보다 좋은 제구와 완급 조절
그리고 경기 운영으로 오랫동안 빅리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임찬규 역시 두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로 운영 능력과
컨트롤을 직접 꼽았습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투구 스타일과 상당히 닮은 선택입니다.
빠른 공을 갖지 못했다면 그것을 억지로 따라가는 대신
다른 무기를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임찬규가 강속구 투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메이슨 밀러를 비롯한 빠른 투수들을 좋아한다고 말한 뒤
밀워키 제이콥 미저라우스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미저라우스키는 201cm의 큰 신장에서 16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며 최고 168.1km까지 기록한 투수입니다.
올 시즌에도 24경기 모두 선발로 나와 145이닝
13승5패 평균자책점 1.68과 216탈삼진을 기록 중입니다.
9이닝당 탈삼진이 13개를 넘는 말 그대로 힘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메이저리그 정상급 파워피처입니다.
여기서 임찬규 특유의 유쾌한 비교가 나왔습니다.
미저라우스키가 포심과 커터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구종과 똑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바로 숫자였습니다.
미저라우스키의 직구가 160km대라면 자신은 140km대이고
커브도 130km대와 110km대로 약 20km 차이가 납니다.
슬라이더 역시 미저라우스키가 140km 중후반이라면
자신은 130km 초반이라고 웃으며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공에서 20km씩 빼면 자신과 비슷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농담이면서 동시에 정확한 자기 분석이었습니다.
만약 임찬규가 아직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투수였다면
이런 비교는 자신의 부족함을 웃어넘기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임찬규는 시즌 12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이고
LG에서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책임지는 투수입니다.
168.1km를 던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140km 안팎의 공으로도 타자를 잡는 방법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저라우스키와 자신의 차이를 웃으며 말할 수 있고
빠른 공을 부러워하면서도 투구 스타일을 흔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가진 무기를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임찬규가 오랫동안 선발로 살아남은 이유에 가깝습니다.
미저라우스키라면 강한 공을 존 안으로 밀어 넣는 것만으로도
타자에게 상당한 압박을 줄 수 있습니다.
임찬규 본인도 그 정도 구위라면 커맨드가 크게 중요하겠느냐며
네모 안에 넣기만 해도 될 것 같다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임찬규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NC전에서도 타자들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성향을
파악한 뒤 빠른 인플레이 승부를 계획했습니다.
구속으로 타자를 밀어내는 대신 타자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먼저 읽고 그 반대 선택을 가져가는 것이 임찬규의 방식입니다.
LG는 이날 오스틴의 멀티홈런과 송찬의의 홈런까지
세 방을 터뜨리면서 NC를 8대0으로 크게 이겼습니다.
타선이 넉넉하게 점수를 뽑아준 경기였지만 임찬규가
6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준 덕분에 승부도 편하게 흘렀습니다.
가을로 갈수록 선발투수에게 필요한 것은 매 경기
압도적인 구속이나 두 자릿수 탈삼진만은 아닙니다.
경기가 풀리지 않는 날에도 5~6이닝을 책임지고
불펜에 최소한의 부담만 넘기는 능력이 훨씬 중요해집니다.
임찬규가 최근 네 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는
사실도 그래서 12승이라는 숫자 못지않게 의미가 있습니다.
임찬규는 경기 뒤 다승 경쟁에 대해서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신이 승리를 많이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나온
경기에서 LG도 많이 이겼다는 뜻이라 그 부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승수는 자신이 신경 쓴다고 만들어지는 기록도 아니고
매 공에 집중하다 보면 결과가 따라온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선발승은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타선과 불펜의
도움이 있어야 완성되는 만큼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대신 임찬규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여섯 이닝을
어떤 방식으로 막아낼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임찬규는 미저라우스키처럼 160km를 넘는 직구도 없고
한 경기에서 삼진을 10개씩 잡는 유형의 투수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구속과 구종 그리고 타자의 성향을 조합해
KBO에서 선발승을 만드는 방법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강속구 투수를 보며 감탄하면서도 자신의 공까지 억지로
그 방향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 점도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168.1km라는 숫자는 분명 화려하지만 임찬규에게 필요한
숫자는 결국 6이닝과 팀 승리 그리고 다음 등판입니다.
빠른 공이 없어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버티는 능력.
그것이 지금 임찬규를 다승 공동 선두까지 올려놓았습니다.